에스페란토 데 마소리스 Esperanto de Maso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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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859.12.15 에스페란토 창시 자멘호프 출생

마소리스20 2015. 3. 20. 09:45

1859.12.15  에스페란토(Esperanto) 창시 자멘호프(L. L. Zamenhof) 출생

 

 

 

 

 

 

1887.07.26 에스페란토 발표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9182

1917.04.14 자멘호프 사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5961

 

 

 

에스페란토(Esperanto) 창시 자멘호프(L. L. Zamenhof) 출생(1859-12-15)-부산일보, 2010-12-13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newsId=20101213000056

 

'에스페란토' 자멘호프 출생(1859-12-15)-동아일보, 2004-12-1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0&aid=0000275464

 

폴란드의 안과의사 라자루스 루드비히 자멘호프 출생(1859-12-15)
인공 국제보조어인 에스페란토 만들어-네이버뉴스, 2001-12-1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8&aid=0000115883

 

 

 

 

 

 

1859년 12월15일 폴란드의 안과의사 라자루스 루드비히 자멘호프가 태어났다.

1917년 몰(歿). 자멘호프는 안과의사로서 보다는 인공 국제보조어인 에스페란토를 만든 사람으로 훨씬 더 유명하다.

에스페란토로 ‘희망하는사람’이라는 뜻의 ‘에스페란토’를 자멘호프는자신의 필명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자멘호프가 태어난 비아위스토크는 폴란드인, 독일인, 러시아인, 유대인이 섞여살던 도시로, 이들의 반목은 성장기의 자멘호프에게 깊은 그늘을남겼다.

자멘호프는 그 반목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이들의 언어가 서로 다르다는데 있다고 생각하고, 중립적인 국제어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만들고 다듬어온 국제어를 1887년 7월 에스페란토라는이름으로 발표했다.

자멘호프가 죽은 이듬해인 1918년에는 에스페란토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국제에스페란토협회가 설립됐다.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 본부를 둔 이 협회에는 2000년 현재 120개국이 가입해 있다. 한국은 1976년에 가입했고,1994년 7월 서울에서 세계대회를 연바 있다.

한국에 에스페란토가 소개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다. 1916년 8월 일본에 유학하던 김억,이광수, 오상순 등의 문인들이 도쿄에서 에스페란토를배운 바 있고, 1920년 서울 YMCA에서 김억이 한국 최초의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연 것을계기로 에스페란토 인구가 조금씩 늘어났다.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에스페란토로는 에스페란티스토라고 하는데, 김억은 한국의 첫 에스페란티스토였던 셈이다.

그러나 여느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인들이 국제적 의사소통을 위해서 배우는 언어는 에스페란토가 아니라 영어다.

에스페란토한 마디. 미 아마스 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고종석 편집위원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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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러시아 지배 하의 폴란드. 이 나라의 북동부 도시 비아위스토크에는 4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폴란드인, 러시아인, 독일인, 유대인. 이들 네 민족은 각기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했고,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고수하며 섞여 살았다. 그곳의 유대인 가정에서 1859년 12월 15일 라자루스 루드비히 자멘호프가 태어났다.

자멘호프는 어린시절부터 민족간의 불화와 반목을 겪으며 성장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네 민족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적대했다. 언어의 차이가 불통과 불신을 낳았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자멘호프는 모든 민족이 소통할 수 있는 '중립적인 국제어'를 만들어야 겠다고 결심했다. 가정과 학교에서 러시아어·그리스어·프랑스어·영어 등 10개 국어를 습득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언어학은 배우지 않았지만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공통점과 장점을 추려냈다.


이미 고교시절인 1878년 19살때 자멘호프는 기초적인 인공어를 개발했다. 안과개업한 후 틈틈이 개정과 보완을 거쳐 1887년 7월 국제어 첫 교본을 출간했다. 책에는 16개 문법과 917개 단어의 용례, 성경 번역 등을 담았다. 이때 자멘호프는 에스페란토란 필명을 썼는데, 이것이 뒷날 언어 명칭으로 굳어졌다. 에스페란토는 '희망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자멘호프는 에스페란토에 평화사상을 심었다. 언어의 평등, 언어를 통한 세계평화를 이루고자 했다. 이 대의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에스페란토는 세계로 퍼져 나갔다. 현재 사용자 수는 120여개 국 300~500만 명. 한국에서는 1906년 고종 황제가 처음 에스페란토를 공부했다고 하며, 시인 김억이 1920년부터 일반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정광용 기자/부산일보

 

 

 

[동아일보]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도시엔 4개의 민족이 섞여 있었다. 러시아인, 폴란드인, 독일인, 그리고 유대인. 그들은 각각 자신의 언어를 썼고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을 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인류는 모두 형제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거리에 나서면 인류는 없고 오직 민족만 존재했다. 어른이 되면 꼭 이 부조리를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루드비히 자멘호프(1859∼1917). 바벨탑 이전 시대를 그리워했던 이상주의자.

1859년 12월 15일 폴란드 비아위스토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사람 사이의 증오가 언어 장벽 때문에 생긴다고 믿었다.

바르샤바에서 보낸 고교 시절부터 세계 공용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 작품이 완성된 것은 1878년, 당시 그의 나이 불과 열아홉이던 때. 세계적인 언어를 공개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을까. 세계 공용어는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안과 의사 생활을 시작한 1885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데뷔했다. 당시 언어의 교본에 썼던 그의 필명이 ‘닥터 에스페란토’. 에스페란토는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언어의 명칭으로 굳어졌다.

에스페란토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각지로 퍼져 나갔다. 한국에는 1920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시인 김억이 서울YMCA에서 강습회를 열면서 처음 소개됐다. 세계적으로 160만 명 정도가 에스페란토를 유창하게 쓰는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6000여 종. 그 가운데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언어는 에스페란토 하나뿐이다. 기록에는 800여 종의 인공어가 보이지만 언중(言衆)이 수용하지 않았다.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 같은 저명한 철학자가 발표한 인공어조차 그저 발표로 끝났다.

에스페란토의 위대함은 남아 있는 유일한 인공어라는 점 때문이 아니다. 그 배경에 흐르는 사상에 있다. 만인 평등과 세계 평화. 자멘호프는 이를 ‘호마라니스모(인류인주의 또는 지구인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평화를 바랐던 이상주의자의 고향은 그의 사후에도 그다지 평화롭지 않았다. 대부분이 유대인이던 비아위스토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주민의 절반 이상이 살해되고 도시도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홍석민 기자 / 동아일보

 

 

 

에스페란토[ Esperanto ]

1887년 폴란드의 안과 의사인 자멘호프(Zamenhof, L. L.)에 의하여 창안 발표된 국제 공용어(國際公用語). 1민족 2언어 주의에 입각하여 같은 민족끼리는 모국어를, 다른 민족과는 에스페란토의 사용을 주창(主唱)하면서 이를 통하여 만인 평등과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언어 운동이다.

 

〔고안동기〕

자멘호프의 출생지인 폴란드의 비알리스토크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으며 독일과의 분쟁 중에 있었다. 유태인인 자멘호프는 유태인, 폴란드인, 독일인, 러시아인들이 모여 사는 자신의 고향에서 싸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보며 자랐다.

 

그는 민족간의 불화와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서로 다른 언어사용으로 인한 의사의 불소통 때문이라 생각하고, 모든 사람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국제 공통어를 고안하게 되었다.

 

유럽의 여러 언어에 능통하였던 그는, 그들 언어의 공통점과 장점만을 모아 예외와 불규칙이 없는 문법과 알기 쉬운 어휘를 기초로 한 ≪국제어 Internacia Lingvo≫를 1887년에 바르샤바에서 발표하였다. Esperanto는 그때 사용하였던 자멘호프의 필명으로 ‘희망하는 사람’의 뜻이며 나중에 이 언어의 이름이 되었다.

 

자멘호프는 1905년 ≪에스페란토의 기초 Fundamento de Esperanto≫를 발간하여 언어의 기본 구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많은 예문과 문학 작품을 수록하여 사용자들의 모범이 되도록 하였다.

 

〔문자구성 및 특성〕

에스페란토 반포를 전후하여 주로 유럽에서 볼라퓌크(Volap0x8057k) 등을 비롯한 수많은 인공(人工) 국제어가 발표되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현재 사용되는 것은 에스페란토뿐이다.

 

에스페란토의 문자는 모두 28개로 a, e, i, o, u의 모음과 b, c, ○, d, f, g, ○, h, ○, j, ○, k, l, m, n, p, r, s, ○, t, 0x802a, v, z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자 1음(一字一音)의 원칙에 따라 모든 문자는 하나의 소리를 내고 또한 소리 나지 않는 문자도 없으며, 강세(强勢)는 항상 뒤에서 두 번째 모음에 있기 때문에 뜻을 몰라도 사전 없이 문장을 읽을 수 있다.

 

단어는 주로 인도 유럽어 계통(系統)의 언어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형태를 어간(語幹)으로 하여 누구나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게 하였다(예 : suno 태양, bela 아름다운).

 

각 어간에 품사 고유의 어미를 붙여 명사는 -o, 형용사는 -a, 부사는 -e, 동사(원형)는 -i로 끝나고, 시제(時制) 또한 동사의 어간에 과거형은 -is, 현재형은 -as, 미래형은 -os를 붙여 나타낸다(예 : amo 사랑, ama 사랑의, ame 사랑으로, ami 사랑하다, amis 사랑하였다, amas 사랑한다, amos 사랑할 것이다).

 

특정한 의미를 갖는 접두사와 접미어를 사용하여 많은 단어를 파생시켜 사용하므로 단어 암기의 노력이 매우 줄어드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예 : patro 아버지, patrino 어머니, bopatro 장인, bopatrino 장모).

 

복수와 목적격은 명사와 형용사의 어미에 각각 -j와 -n을 붙여 나타낸다(예: Mi legis du interesajn librojn. 나는 두 권의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보급 및 활동상황〕

발표 초기에는 유럽을 중심으로 단편적으로 보급되다가, 1905년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에스페란토대회(Universala Kongreso de Esperanto)가 개최되고 1908년 세계에스페란토협회(Universala Esperanto-Asocio)가 결성되면서 보급 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였다.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의 본부는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 있으며, 1996년 현재 우리 나라(1976년 가입)를 비롯한 58개국의 국가 지부가 가입되어 있다. 유엔 산하의 비정부단체의 하나로서 1954년부터 유네스코와 영사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다.

 

과학, 교육, 경제, 예술, 스포츠 등 45개 전문 분과 단체가 활동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 약 2,000명의 대표자(delegito)를 두어 여러 전문 분야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박 제도(Pasporta Servo)를 통하여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매년 한 번씩 개최되는 세계 대회에는 수 천명의 에스페란토 사용자가 참가하여 통역 없이 각종 회의를 통하여 의사를 교환하고, 연극, 영화, 인형극 등을 공연하며, 또한 자유로운 만남을 통하여 우의를 다진다. 중국, 바티칸, 폴란드, 오스트리아, 쿠바 등 11개국에서 단파 및 위성 방송을 통하여 매일 수차례씩 에스페란토 국제 방송을 하고 있다.

 

≪성경≫, ≪논어≫, ≪코란≫을 비롯하여 ≪햄릿≫ 등 셰익스피어의 희곡, ≪죄와 벌≫, ≪데카메론≫, ≪파우스트≫, ≪돈키호테≫, ≪설국≫ 등 동서고금의 작품들이 에스페란토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작 소설과 시의 창작 활동도 활발하다.

 

〔우리 나라에의 보급〕

우리 나라에 에스페란토가 보급된 것은 1920년 김억(金億)에 의해 YMCA에서 공개 강습회가 개최된 것이 시초로서, 이 강습회의 강습생들을 중심으로 같은 해 조선 에스페란토 협회가 창립되었고, 김억과 함께 신봉조(辛奉祚)·홍명희(洪命熹백남규(白南奎) 등이 초기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김억은 1920년 발간된 ≪폐허 廢墟≫지의 창간호에 ≪La Ruino 폐허≫라는 에스페란토 창작 시를 발표하였고, 1922년 ≪개벽 開闢≫지에 ≪에쓰페란토 자습실≫을 발표하는 등 자신의 문학 활동과 에스페란토 보급 활동을 연결하고자 노력하였다.

 

1923년 최초의 강습서인 ≪강습용 에쓰페란토 독본≫이 신봉조에 의하여 발간되었으며, 1924년에는 조선 일보에 115회에 걸쳐 에스페란토 강습란이 연재되었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는 매주 1회씩 47회에 걸쳐 에스페란토 고정란이 게재되는 등 활발한 대중 보급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김억은 1930년대 중반까지 김동인의 ≪감자≫를 비롯한 단편 소설을 번역하였고, 동아일보와 ≪삼천리 三千里≫지 등에 많은 논문을 게재하였다. 1937년 홍형의(洪亨義)에 의해 순(純)에스페란토 잡지인 ≪Korea Esperantisto≫가 창간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에 의해 곧 폐간되었다.

 

나비 학자인 석주명(石宙明)은 전공 논문의 내용 또는 요약을 에스페란토로 발표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1947년에 ≪국제어 에스페란토 교과서≫를 출간하였다.

 

6·25 후 1960년대 중반까지 부산의 이재현(李在賢), 대구의 최해청(崔海淸), 홍형의, 서병택(徐丙澤), 그리고 서울의 최봉렬(崔鳳烈) 등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여 오던 활동은 1975년 한국에스페란토협회(Korea Esperanto-Asocio)가 서울에서 창립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후 대학을 중심으로 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보급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76년 한무협(韓武協)에 의해 창간된 홍보지 ≪La Espero el Koreio 한국의 희망≫는 1994년 폐간될 때까지 123호가 발행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메밀꽃 필 무렵≫, ≪백치 아다다≫, ≪발가락이 닮았다≫, ≪제3 인간형≫, ≪타인의 방≫ 등이 에스페란토로 번역 발표되었다.

 

이재현에 의해 1969년에 ≪에스페란토-국어 사전≫이, 1982년에는 ≪국어-에스페란토 사전≫이 발간되었다. 장충식(張忠植)은 1985년에 에스페란토를 단국대학교의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하고, 1986년에는 부설 에스페란토 연구소를 설립하여 에스페란토의 학문적 연구 수준을 제고(提高)하였다.

 

1994년 제79차 세계대회가 1,7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에서 성공리에 개최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높아졌다. 1995년에는 이종영(李種永)이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의 회장에 취임하여 유엔과 유럽 연합 등 국제 기구에 의한 공식(公式) 언어로서의 채택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Historio de la Lingvo Esperanto(Privat저, Internacia Esperanto-Instituto, 1982)
≪참고문헌≫ 韓國에스페란토運動史(金三守,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1976)
≪참고문헌≫ Jarlibro(세계에스페란토협회年鑑, Universala Esperanto-Asocio, 1997)

 

 

자멘호프[ L(udwik) L(ejzer) Zamenhof ]

1859. 12. 15 러시아령 폴란드 비아우이스토크~1917. 4. 14 바르샤바.

러시아의 내과·안과 의사.

 

 

 

국제 인공언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에스페란토를 만들었다 (→ 에스페란토).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 인종적·국가적 갈등이 끊이지 않는 폴란드와 러시아 국경 지역에서 살았다. 자멘호프는 이런 환경 속에서 살면서 주로 국제언어의 개발을 통해 관용을 촉진하는 데 헌신했다. 그런 종류의 언어를 고안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실험을 거듭한 뒤, 그는 독토로 에스페란토('희망에 찬 박사'라는 뜻)라는 필명으로 해설적 교과서 〈국제언어 Lingvo Internacia〉(1887)를 출판했다. 그의 필명인 에스페란토('희망하는 [사람]')는 이 언어의 명칭이 되었다.

 

자멘호프는 의사 일을 계속하면서, 에스페란토를 더욱 발전시키고 그 지지자들의 모임을 조직하는 데 힘썼다. 1889년 최초의 에스페란토 잡지가 나왔고, 1893년 정식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자멘호프는 문학과 언어에 대해 어느 정도의 소양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성서〉, 〈햄릿〉,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집〉, 몰리에르·괴테·고골리의 희곡을 비롯한 수많은 문학작품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함으로써 자신이 만든 새로운 언어를 개발하고 시험했다. 프랑스 불로뉴에서 열린 최초의 에스페란토 국제회의(1905)와 그후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해마다 열린 국제회의에서 자멘호프는 기억할 만한 수많은 연설을 했지만, 1912년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에스페란토 운동의 정식 지도자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가 쓴 〈에스페란토의 기초 Fundamento de Esperanto〉(17판, 1905)는 에스페란토의 구조와 낱말 형성의 원칙을 확립했다. 1960년에 마조리 불턴이 쓴 그의 전기 〈에스페란토의 창시자 자멘호프 Zamenhof, Creator of Esperanto〉가 출판되었다.

 

 

/네이트 백과사전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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