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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887.07.26 루드비크 자멘호프, 에스페란토 책 발표

마소리스20 2015. 3. 20. 09:45

 

1887.07.26  루드비크 자멘호프(Ludwig Lazarus Zamenhof), 에스페란토(Esperanto) 책 발표

 

 

 

 

 

 

 

 

1859.12.15 자멘호프 출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54601

1917.04.14 자멘호프 사망 :  http://blog.daum.net/gjkyemovie/11345961

 

 

 

 

 

 

ㆍ28세에 창안한 ‘지구촌 보편어’

19세기 폴란드는 동유럽 전역이 그러했듯 다문화 사회였다. 폴란드인을 비롯해 독일인, 러시아인, 유대인 등 이주자들이 뒤섞여 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다문화 사회는 한편으로 다언어 사회를 의미한다. 언어의 차이는 각 문화 간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폴란드 태생 루드비크 자멘호프(1859~1917)는 이런 언어장벽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구촌 누구나 쉽게 배워서 소통할 수 있는 보편어를 꿈꿨다. 자멘호프는 가정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했지만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학교에서 혹은 독학으로 배웠다. 보편어에 대한 열망은 다양한 언어 습득 과정에서 싹텄다.

자멘호프는 언어학이라는 것을 접해본 적이 없었다. 대신 그는 개별 언어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개별 언어들이 연장이자 재료였다. 19살 무렵 그는 하나의 인공어를 발명해냈다. 성경 구절 몇 개가 세상에 없던 낯선 말로 번역된 것이 발명품의 전부였다. 그러나 체계가 있고 구조를 갖춘 ‘언어’였다.

그의 발명품은 9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자멘호프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러시아 차르 세력이 지배하는 폴란드에서 출간하면 당장 볼온서적으로 낙인찍힐 것이라고 봤다. 보편어, 국제어를 표방한 자멘호프의 발명품이 공산주의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멘호프에게 대학 공부를 모두 마친 뒤 되돌려주겠다며 발명품을 압수했다. 하지만 약속을 어기고 아들의 발명품을 불태워버렸다.

자멘호프는 더 연구하고 보완해 28살에 비로소 자신의 발명품을 <첫번째 책(Unua Libro)>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1887년 7월26일의 일이다. 러시아어로 쓰인 이 책은 917개 어근 및 16개 문법, 번역된 성경 구절, 번역시, 자작시 등을 싣고 있다.

이 책은 제목보다 ‘에스페란토’로 불렸다. 에스페란토는 저자명이었다. 자멘호프는 가족들이 불미스러운 일을 겪을까 염려해 본명 대신 에스페란토, 즉 ‘희망하는 사람’이라는 필명을 썼다. 에스페란토는 점차 자멘호프가 창안한 보편어를 지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경향신문

 

 

 

 

에스페란토[ Esperanto ]

1887년 폴란드의 안과 의사인 자멘호프(Zamenhof, L. L.)에 의하여 창안 발표된 국제 공용어(國際公用語). 1민족 2언어 주의에 입각하여 같은 민족끼리는 모국어를, 다른 민족과는 에스페란토의 사용을 주창(主唱)하면서 이를 통하여 만인 평등과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언어 운동이다.

 

〔고안동기〕

자멘호프의 출생지인 폴란드의 비알리스토크는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으며 독일과의 분쟁 중에 있었다. 유태인인 자멘호프는 유태인, 폴란드인, 독일인, 러시아인들이 모여 사는 자신의 고향에서 싸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보며 자랐다.

 

그는 민족간의 불화와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서로 다른 언어사용으로 인한 의사의 불소통 때문이라 생각하고, 모든 사람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국제 공통어를 고안하게 되었다.

 

유럽의 여러 언어에 능통하였던 그는, 그들 언어의 공통점과 장점만을 모아 예외와 불규칙이 없는 문법과 알기 쉬운 어휘를 기초로 한 ≪국제어 Internacia Lingvo≫를 1887년에 바르샤바에서 발표하였다. Esperanto는 그때 사용하였던 자멘호프의 필명으로 ‘희망하는 사람’의 뜻이며 나중에 이 언어의 이름이 되었다.

 

자멘호프는 1905년 ≪에스페란토의 기초 Fundamento de Esperanto≫를 발간하여 언어의 기본 구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많은 예문과 문학 작품을 수록하여 사용자들의 모범이 되도록 하였다.

 

〔문자구성 및 특성〕

에스페란토 반포를 전후하여 주로 유럽에서 볼라퓌크(Volap0x8057k) 등을 비롯한 수많은 인공(人工) 국제어가 발표되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현재 사용되는 것은 에스페란토뿐이다.

 

에스페란토의 문자는 모두 28개로 a, e, i, o, u의 모음과 b, c, ○, d, f, g, ○, h, ○, j, ○, k, l, m, n, p, r, s, ○, t, 0x802a, v, z의 자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자 1음(一字一音)의 원칙에 따라 모든 문자는 하나의 소리를 내고 또한 소리 나지 않는 문자도 없으며, 강세(强勢)는 항상 뒤에서 두 번째 모음에 있기 때문에 뜻을 몰라도 사전 없이 문장을 읽을 수 있다.

 

단어는 주로 인도 유럽어 계통(系統)의 언어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형태를 어간(語幹)으로 하여 누구나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게 하였다(예 : suno 태양, bela 아름다운).

 

각 어간에 품사 고유의 어미를 붙여 명사는 -o, 형용사는 -a, 부사는 -e, 동사(원형)는 -i로 끝나고, 시제(時制) 또한 동사의 어간에 과거형은 -is, 현재형은 -as, 미래형은 -os를 붙여 나타낸다(예 : amo 사랑, ama 사랑의, ame 사랑으로, ami 사랑하다, amis 사랑하였다, amas 사랑한다, amos 사랑할 것이다).

 

특정한 의미를 갖는 접두사와 접미어를 사용하여 많은 단어를 파생시켜 사용하므로 단어 암기의 노력이 매우 줄어드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예 : patro 아버지, patrino 어머니, bopatro 장인, bopatrino 장모).

 

복수와 목적격은 명사와 형용사의 어미에 각각 -j와 -n을 붙여 나타낸다(예: Mi legis du interesajn librojn. 나는 두 권의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보급 및 활동상황〕

발표 초기에는 유럽을 중심으로 단편적으로 보급되다가, 1905년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에스페란토대회(Universala Kongreso de Esperanto)가 개최되고 1908년 세계에스페란토협회(Universala Esperanto-Asocio)가 결성되면서 보급 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였다.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의 본부는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 있으며, 1996년 현재 우리 나라(1976년 가입)를 비롯한 58개국의 국가 지부가 가입되어 있다. 유엔 산하의 비정부단체의 하나로서 1954년부터 유네스코와 영사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다.

 

과학, 교육, 경제, 예술, 스포츠 등 45개 전문 분과 단체가 활동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 약 2,000명의 대표자(delegito)를 두어 여러 전문 분야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박 제도(Pasporta Servo)를 통하여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매년 한 번씩 개최되는 세계 대회에는 수 천명의 에스페란토 사용자가 참가하여 통역 없이 각종 회의를 통하여 의사를 교환하고, 연극, 영화, 인형극 등을 공연하며, 또한 자유로운 만남을 통하여 우의를 다진다. 중국, 바티칸, 폴란드, 오스트리아, 쿠바 등 11개국에서 단파 및 위성 방송을 통하여 매일 수차례씩 에스페란토 국제 방송을 하고 있다.

 

≪성경≫, ≪논어≫, ≪코란≫을 비롯하여 ≪햄릿≫ 등 셰익스피어의 희곡, ≪죄와 벌≫, ≪데카메론≫, ≪파우스트≫, ≪돈키호테≫, ≪설국≫ 등 동서고금의 작품들이 에스페란토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작 소설과 시의 창작 활동도 활발하다.

 

〔우리 나라에의 보급〕

우리 나라에 에스페란토가 보급된 것은 1920년 김억(金億)에 의해 YMCA에서 공개 강습회가 개최된 것이 시초로서, 이 강습회의 강습생들을 중심으로 같은 해 조선 에스페란토 협회가 창립되었고, 김억과 함께 신봉조(辛奉祚)·홍명희(洪命熹백남규(白南奎) 등이 초기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김억은 1920년 발간된 ≪폐허 廢墟≫지의 창간호에 ≪La Ruino 폐허≫라는 에스페란토 창작 시를 발표하였고, 1922년 ≪개벽 開闢≫지에 ≪에쓰페란토 자습실≫을 발표하는 등 자신의 문학 활동과 에스페란토 보급 활동을 연결하고자 노력하였다.

 

1923년 최초의 강습서인 ≪강습용 에쓰페란토 독본≫이 신봉조에 의하여 발간되었으며, 1924년에는 조선 일보에 115회에 걸쳐 에스페란토 강습란이 연재되었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는 매주 1회씩 47회에 걸쳐 에스페란토 고정란이 게재되는 등 활발한 대중 보급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김억은 1930년대 중반까지 김동인의 ≪감자≫를 비롯한 단편 소설을 번역하였고, 동아일보와 ≪삼천리 三千里≫지 등에 많은 논문을 게재하였다. 1937년 홍형의(洪亨義)에 의해 순(純)에스페란토 잡지인 ≪Korea Esperantisto≫가 창간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에 의해 곧 폐간되었다.

 

나비 학자인 석주명(石宙明)은 전공 논문의 내용 또는 요약을 에스페란토로 발표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1947년에 ≪국제어 에스페란토 교과서≫를 출간하였다.

 

6·25 후 1960년대 중반까지 부산의 이재현(李在賢), 대구의 최해청(崔海淸), 홍형의, 서병택(徐丙澤), 그리고 서울의 최봉렬(崔鳳烈) 등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여 오던 활동은 1975년 한국에스페란토협회(Korea Esperanto-Asocio)가 서울에서 창립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후 대학을 중심으로 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보급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76년 한무협(韓武協)에 의해 창간된 홍보지 ≪La Espero el Koreio 한국의 희망≫는 1994년 폐간될 때까지 123호가 발행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메밀꽃 필 무렵≫, ≪백치 아다다≫, ≪발가락이 닮았다≫, ≪제3 인간형≫, ≪타인의 방≫ 등이 에스페란토로 번역 발표되었다.

 

이재현에 의해 1969년에 ≪에스페란토-국어 사전≫이, 1982년에는 ≪국어-에스페란토 사전≫이 발간되었다. 장충식(張忠植)은 1985년에 에스페란토를 단국대학교의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하고, 1986년에는 부설 에스페란토 연구소를 설립하여 에스페란토의 학문적 연구 수준을 제고(提高)하였다.

 

1994년 제79차 세계대회가 1,7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에서 성공리에 개최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높아졌다. 1995년에는 이종영(李種永)이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의 회장에 취임하여 유엔과 유럽 연합 등 국제 기구에 의한 공식(公式) 언어로서의 채택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Historio de la Lingvo Esperanto(Privat저, Internacia Esperanto-Instituto, 1982)
≪참고문헌≫ 韓國에스페란토運動史(金三守, 숙명여자대학교출판부, 1976)
≪참고문헌≫ Jarlibro(세계에스페란토협회年鑑, Universala Esperanto-Asocio, 1997)

 

 

자멘호프[ L(udwik) L(ejzer) Zamenhof ]

1859. 12. 15 러시아령 폴란드 비아우이스토크~1917. 4. 14 바르샤바.

러시아의 내과·안과 의사.

 

 

 

국제 인공언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에스페란토를 만들었다 (→ 에스페란토).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 인종적·국가적 갈등이 끊이지 않는 폴란드와 러시아 국경 지역에서 살았다. 자멘호프는 이런 환경 속에서 살면서 주로 국제언어의 개발을 통해 관용을 촉진하는 데 헌신했다. 그런 종류의 언어를 고안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실험을 거듭한 뒤, 그는 독토로 에스페란토('희망에 찬 박사'라는 뜻)라는 필명으로 해설적 교과서 〈국제언어 Lingvo Internacia〉(1887)를 출판했다. 그의 필명인 에스페란토('희망하는 [사람]')는 이 언어의 명칭이 되었다.

 

자멘호프는 의사 일을 계속하면서, 에스페란토를 더욱 발전시키고 그 지지자들의 모임을 조직하는 데 힘썼다. 1889년 최초의 에스페란토 잡지가 나왔고, 1893년 정식 단체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자멘호프는 문학과 언어에 대해 어느 정도의 소양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성서〉, 〈햄릿〉,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집〉, 몰리에르·괴테·고골리의 희곡을 비롯한 수많은 문학작품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함으로써 자신이 만든 새로운 언어를 개발하고 시험했다. 프랑스 불로뉴에서 열린 최초의 에스페란토 국제회의(1905)와 그후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해마다 열린 국제회의에서 자멘호프는 기억할 만한 수많은 연설을 했지만, 1912년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에스페란토 운동의 정식 지도자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가 쓴 〈에스페란토의 기초 Fundamento de Esperanto〉(17판, 1905)는 에스페란토의 구조와 낱말 형성의 원칙을 확립했다. 1960년에 마조리 불턴이 쓴 그의 전기 〈에스페란토의 창시자 자멘호프 Zamenhof, Creator of Esperanto〉가 출판되었다.

 

 

/네이트 백과사전

 

 

 

 

 

 

 

 

출처 : 추억속으로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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